

#주의 : 가면라이더 에그제이드 작품 후반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괜찮으신 분들만 읽어주세요.
규칙적으로 컵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진한 초콜릿이 담긴 머그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히이로는 곧 헛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픽 흘려버렸다. 당장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으리만치 사치스러운 여유였다. 조용한 센터. 누가 상처입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선택을 내리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고요함. 지난 일 년간 쉴 새 없이 달려온 탓에 겨우 찾아온 평화가 아직은 어색하다. 히이로는 초점을 흐리고 감상에 잠기는 일이 잦아진 자신이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본인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미지근해진 초콜릿을 마저 마시며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가 조금 넘었다. 마침 계단을 오르는 다소 불안한 리듬의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했다. 히이로는 케이크를 몸 앞으로 끌어다 놓으며 나이프를 들었다.
"히이로 씨, 안녕... 으악!"
"에무!"
"......연수의, 그 꼴은 뭐지?”
나선 계단의 마지막 발판에서 어김없이 발을 헛디뎌 화려하게 엎어져 버린 에무에 도레미파 비트 룸에 있던 뽀삐는 기겁하며 달려가 부축했고, 히이로는 테이블에 앉아 나이프를 든 자세 그대로 에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평소 같으면 별 말 없이 케이크로 다시 관심을 돌려버렸겠지만 의사 가운과 함께 널브러져 있는 의미 불명의 검은색 천과 바닥에 뒹굴다시피 한 와중에도 무사히 지켜낸 바구니가 그의 시선에 걸렸다. 호박 랜턴 모양의 주황색 플라스틱 바구니.
"아야야...... 이거! 여러분 몫이에요!"
"......?"
"아. 오늘은 할로윈 이벤트로 분장한 채로 진료를 봤거든요, 초콜릿이랑 사탕도 나눠주고. 뽀삐랑 히이로 씨... 어, 키리야 씨는요?"
"조사할 게 있대서. 오늘은 아마 안 올 거야."
"아...... 남겨둬야겠네요. 아무튼 여러분한테도 주고 싶어서 좀 챙겨왔죠!"
에무는 가운과 함께 엉켜 있던 이벤트용 마법사 로브를 펼쳐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성품 치곤 마감이 잘 된 호박 바구니에는 사탕과 초콜릿이 입구 부근까지 차 있었다. "와아, 에무! 고마워!" 테이블에 바구니를 올려놓자 뽀삐는 색색으로 반짝이는 갖가지 사탕들을 이리저리 헤집어보며 들떠했고, 히이로는 '괜한 짓을 했다'는 표정으로 에무를 흘깃 바라본 뒤 자연스럽게 바구니를 함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히이로 씨, 단 것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어제 특별히 골랐다고요."
"시끄러워."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안 그러면 이가 아야..."
"시끄럽다고 했다!"
장난스레 그 옆으로 다가와 아이를 대하듯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타이르는 에무에 결국 히이로는 화를 내 버렸고, 뽀삐는 사탕 하나를 골라 입에 넣으며 피하는 시늉을 했다. 아, 잘못했어요. 히이로에게서 떨어지며 에무가 손을 모아 고개를 숙여 보이자 뽀삐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히이로도 곧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희미하게 웃어버렸다.
"이거 예쁘다! 처음 보는 사탕인데?"
"캔디슈퍼에는 처음 가 봤는데 사탕 종류가 생각보다 다양하더라고요. 한참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담아 버렸어요."
"열심이네, 에무."
"아이들이 좋아했으면 해서요. 히이로 씨, 마음에 드세요?"
벌써 사탕 하나를 입 안에 넣은 히이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결한 칭찬에 에무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심 히이로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을지를 고민했던 탓이다. 바구니에서 사탕 몇 개를 꺼내 라벨을 들여다보던 뽀삐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호박 바구니를 가리켰다.
"근데 에무, 할로윈에는 왜 사탕을 주는 거야?"
"아, 변장을 한 아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Trick or Treat! 을 외치거든요. 장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사탕을 줘야 해요."
"어... 변장은 왜 하는 거야? 사실 할로윈에 뭘 하는지만 알지 유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 겐무엔 할로윈이 소재인 게임이 없기도 하고."
일단 호러 게임은 안 만들거든. 뽀삐는 호박 바구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음...... 매년 10월 31일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해요. 그래서 망자들을 봐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기 위해 아예 다 같이 귀신 분장을 하는 거죠. 1년간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던 망자들의 영혼이 다른 몸을 선택하는 날이라 그걸 막으려고 하는 거라고도 하고."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기 위해 다 같이 귀신이 되는 거야? 재밌는 해결책이네.”
“요즘은 그냥 분장하고 노는 정도지만요. 게임 캐릭터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도... 아, 뽀삐는 그대로 나가면 되겠네요!”
“나?”
“네, 뽀삐 코스프레도 가끔 있으니까.”
“와! 그럼 버그스터들도 변장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겠네!”
“평소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잖아요...”
“에무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예전에 어떤 아이가 엄청 진지하게 물어봤었거든요. 좀 별난 아이라... 제가 사탕을 나눠주는 이유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받겠다고 해서요. 뭐, 덕분에 아이들 앞에서 아는 척도 좀 할 수 있게 됐고.”
"그게 뭐야, 에무. 소아과 선생님은 이것저것 알아야 하는 게 많구나."
"아이들이 바보라고 놀리면 슬프다고요."
잠깐만요. 혹시나 싶어 사탕 몇 개를 들고 도레미파 비트 룸 쪽을 들여다봤지만 뭔가에 열중하는 것인지 의미 모를 현수막들이 기기 앞에 잔뜩 늘어져 있었다. 이럴 때 잠깐이라도 건드렸다간 더 의미 모를 말들을 한참 동안 늘어놓을 것이다. 에무는 들고 온 사탕들을 조용히 기계 앞 의자에 올려놓고 방을 빠져나왔다.
"한 번도 할로윈 행사를 본 적이 없다면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요?"
"행사? 응! 보고 싶어! 뭘 하는 거야?"
"아까 이 근처 대로에서 저녁부터 행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각자 변장을 하고 왁자지껄하게 돌아다니는 거죠. 히이로 씨는요? 굳이 변장하지 않더라도 기분이라도 낼 수 있을 텐데."
"난 됐다."
"네, 뭐..."
"...취향이 아닐 뿐이다. 둘이서 다녀 와."
말끝이 처지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히이로는 말을 덧붙였다. 드문 일이었다. 약간 놀란 표정을 지은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곧 동시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히이로, 상냥하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치만 히이로가 변장하는 것도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뽀삐 삐뽀빠...”
“파라드도 가 볼래? 어때?”
“가 보고 싶어!”
궁지에 몰려 억울한 표정이 된 히이로가 결국 폭발하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도 파라드가 에무의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마음이 들떠! 키가 굉장히 큰 남자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는 건 히이로에겐 아직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에무의 주위를 휘적거리다가 테이블에서 의자를 꺼내 턱 앉아버린 파라드를 히이로는 잠시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도 그대로 나가도 되는 거야?”
“아니, 둘 다 신경 쓴 적 있는 것처럼 말하지...”
“에무, 언제 나갈 거야?”
“어... 저녁 7시부터니까 지금 나가야겠네요. 갈까요?”
“가자!”
“히이로 씨, 잠시 다녀올게요. 쿠로토 씨는...”
“감시할 테니 신경쓰지 말고 다녀와라.”
“감사합니다!”
천천히, 천천히 가! 둘 사이에 끼어서 쩔쩔매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 나가는 부모의 모양새였다. 에무를 잡아끄는 파라드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르던 뽀삐마저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나서야 히이로는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혹감에 표정을 확 굳히고 누가 봤을 새라 고개를 휘적거렸다. 물론 아무도 없다. 도레미파 비트 기기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는 불빛을 빼면.
어차피 밖이 보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히이로는 뽀삐가 꺼내어 테이블에 흩어놓은 사탕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으며 몸을 돌렸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많은 것들이 제 자리로 돌아왔고 더 많은 것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그랬다.
[파라드. 파라드, 들려? 어느 쪽이야?]
대답은 없었다.
의도치 않게 길을 막아 흐름을 끊어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행렬을 따라 계속 걸으면서도 에무는 끊임없이 두리번거렸다. 행렬이 갈라진 적도 없는데 대체 언제 사라진 건지, 어떻게 떨어지게 된 건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걸으면 걸을수록 처음 보는 거리 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병원과 이어지는 길이라 출퇴근하면서 자주 왔었는데, 아예 낯선 구간이라니.
이래서야 내 쪽이 미아잖아.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싶을 때부터 계속해서 파라드를 불러 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라드와 함께 다니게 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방 찾겠거니 하고 안일했던 마음에 스멀스멀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둘 다 튀는 옷에 파라드의 키가 큰 편이라 평소라면 바로 눈에 띄었겠지만 주위 사람들이 전부 온갖 화려한 변장을 하고 있으니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뽀삐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둘 다 애도 아니고.
아.
문득 든 생각에 에무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둘을 돌봐야 할 어린아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인간 사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건 맞지만 뽀삐는 꽤 오랫동안 위생청에 소속되어 활동하기까지 했는데, 조금 주제넘은 생각이 아닐까. 어쨌든 인파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것과는 다른 상황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행렬에 섞여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알아서 돌아올 것이므로.
그렇게 생각한 에무는 이 결론에 대해 자신이 아쉬워하고 있음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둘을 데리고 다니며 직접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한 변장들에 대해 알려 주고, 여기저기 가리키면서 할로윈 시즌에 열리는 이벤트들에 대해서도 말해 주고 싶었다.
꽤 넓은 거리에서 크게 열리는 행사인 만큼 대로변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은 제각기 귀신 분장을 하거나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겐무 사의 게임 캐릭터들도 종종 보였다. 뽀삐랑 파라드가 보면 신기해할 텐데. 아직 미련이 남았지만 결국 둘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서 할로윈의 분위기를 느껴 볼 요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로등마다 매달린 검은색 나뭇가지 장식물-할로윈 이벤트를 한다고 하면 자주 볼 수 있는 그것-과 이제 슬슬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해 희미하게 불이 들어온 잭 오 랜턴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황색으로 도색된 얇은 플라스틱 몸체가 전구에서 나온 빛을 퍽 훌륭하게 머금어 내고 있었다. 여유롭게 고개를 휘휘 저어 거리를 둘러 보던 에무의 시야에 순간 아주 이상한 것이 걸렸다.
"어, 어어! 죄송합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에 절대로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얼굴이.
에무는 걸음을 멈추었다. 뒤쪽 행렬이 살짝 늦춰지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 오던 남자와 크게 부딪힐 뻔해 몸을 급하게 틀고,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 겨우 중심을 잡고 바로 서서 고개를 숙이려고 하는 사이에 남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인파에 섞여 들어가 버렸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에무는 순간적으로 파고든 인식이 정확한 것이었음을 재확인했다.
츠지 켄지로, 가면라이더 크로니클이 일본 전역에서 기동된 날 자신이 첫 번째로 목도한 희생자였다. 질량을 갖던 육체가 데이터로 화해 흩어지는 그 짧은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그 날 이래로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위생성의 기자 회견을 준비하면서 신원조회를 요청해 받아낸 자료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서 와, 궁극의 게임의 세계에.
이젠 좀 흐려졌다고 생각했던 그 날의 일 또한 전혀 잊지 못했는지 저를 몰아세웠던 파라드의 말이 되살아났다.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는 그 남자는 어느새 제 죄책감의 표상이 되어 있었다. 휘말리지 않을 수도 있었을 , 지킬 수 없었던 무고한 시민.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든,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 위해서든 우선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히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자 행렬은 그걸 막으려는 것 마냥 더 '강하게 흘렀다.' 마치 의지를 가진 유기체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당황한 에무는 이질감을 느끼고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해요. 그래서 망자들을 봐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기 위해 아예 다 같이 귀신 분장을 하는 거죠.
‘정말이었잖아.’
행렬은 아까와 같이 온갖 변장을 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은 그들이 모른 체 하기 위해 애쓰던 ‘망자들’ 이었다. 에무는 잠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환자들’로 명명했지만.
실체를 알고 나니 행렬은 더욱 기묘하게 보였다. 산 자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뒤섞여 천천히, 같은 방향으로 흐르기를 계속한다. 절대로 끊기거나 갈라지지도 않고 유유히 진행하는 모습은 종교적 제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무는 그 흐름을 따라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를 마주친 순간부터 몸 전체가 박동하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온 신경을 잡아끌고 있다. 한참 동안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다가 갑자기 몸을 움직인 것처럼 와 닿는 감각들이 생소했다. 현실을 붙잡을 감각들이 붕 떠 버리자 눈앞의 광경이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꿈에서 본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무엇인가로 느껴졌다. 서로를 무시한 채 계속되는 행진에 덧씌워진 에무는 급하게 걸치고 나왔던 검정 후드를 당겨 푹 뒤집어썼다. 자신 또한 무시당하기를 바라면서.
어스름이 사물들의 윤곽선을 녹여 내어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일 무렵의 거리를 에무는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거리에 잔뜩 들어찬 사람과 그림자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이사이에 고인 어둠이 태연하게 그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못 본체 하면서, 인파 사이로 갈라지는 불빛이 그들을 비춰내지 못하는 것을 모른 체하면서, 그러다가 이따금 기억하고 있는 얼굴과 마주치면 후드를 더 끌어내리며 먼발치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면서. 손에 잡힐 것처럼 밀도가 높아 질퍽거리기까지 하는 저녁 공기를 한가득 마셨다가 크게 벌린 보폭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 맞추어 뱉어냈다. 눌러 쓴 후드로 얼굴을 가리며 남몰래 입 꼬리를 한껏 올려 보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뭔가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출렁거려서 당장 크게 웃어버리거나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싶었다.
천천히, 하지만 끊기거나 멈추지 않고 흘러 마치 거대한 유기체처럼 보이는 행렬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떠다니던 에무는 문득 그 흐름이 뜸해지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에무를 비껴가며 유유히 흐르기를 계속했다.
거리에 내린 어둠이 점차 완연해지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걸린 호박 등의 불빛이 진해져 이젠 뚜렷한 주황빛을 내었다. 바람에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저녁의 향이 났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자국 사이로 또 다른 형체들이 떠올랐다가, 그 다음 그림자와 겹쳐졌을 때 스러졌다. 고요하고 짧은 부활은 그런 식으로 계속되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나는,
온 몸 구석구석 가득 채웠던 숨을 천천히 뱉어내며 있는 힘껏 외쳤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소리는 없었다.
숨을 끝까지 쥐어짜 가며 말을 토해내고 나서도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호흡을 갑자기 길게 쓴 탓에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발바닥에 땅을 딛는 압력이 와 닿았다. 현실로 돌아가는 감각이었다.
"에무?"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뒤에서 나타난 파라드가 놀란 표정으로 제 어깨를 짚었을 때도 에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뽀삐의 뒤로 보이는 눈에 익은 거리는 이제 완전히 밤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 갑자기 사라져서 깜짝 놀랐어. 불러도 대답하지도 않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너무......"
정말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과 함께 파라드가 느꼈던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둘이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하고 찾기를 포기했던 것이 떠올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이 놀랐겠다. 미안, 파라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헤매다가 놓쳐버렸나 봐. 그래도 뽀삐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뭐? 에무!"
"흐흥, 에무는 나한테 더 의지한다고.”
억울한 얼굴로 에무 쪽을 돌아본 파라드가 해명을 요구하는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에무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자, 자. 나랑 떨어진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이제 8시야.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떨어져 있었어."
"그럼 지금부터라도 같이 다니면서 구경해 볼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좋아! 가자!”
신나게 외치며 먼저 달려 나가 버리려는 뽀삐를 황급히 따라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져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쨍한 색감의 할로윈 조명들이 둥둥 떠서 그 아래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하고 건조한 가을 바람이 한 차례 거리를 휘감았다.
누군가가 오른팔을 잡아왔다.
“누굴 만났어?”
조명을 등진 파라드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록색 조명을 빗겨 간 얼굴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 그리워했던 사람들.”
이제 좀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