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가면라이더 파이즈 작품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괜찮으신 분들만 읽어주세요.
- 친애하는 이누이 타쿠미 군에게.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하하, 벌써부터 이걸 읽어볼 이누이 군의 표정이 기대되네. 사실 받을 사람이 제대로 정해진 편지를 쓴다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많이 떨리고 긴장돼.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 손에 땀도 나고 있을 걸. 아직 준비해 온 편지지를 반도 채우지 못했는데 그만 연필을 놓쳐버려서 그 소리에 옆방에서 자고 있을 이누이 군이 깰까봐 좀 걱정되기도 하네. 그래도 나는 이 편지를 쓰는 걸 멈추지 않을 생각이야.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거든. 우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나에겐 줄곧 그게 이 세상에 남겨두고 온 마지막 짐이었어.
모래알만큼이나 작아서 별 볼일 없을 것처럼 들리는 작은 말들이 목구멍 속에 쌓이고 쌓여 이윽고 커다란 모래성 하나를 만들어낼 때까지, 나는 별처럼 무수히 많은 시간들을 그저 셈하며 기다려야 했어. 그동안 심심하지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사실은 조금 심심했던 것 같기도 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무한정 떠다니기만 하는 건 굉장히 따분하고 생산성 없는 일이었거든. 물론 살아생전보다야 평화롭긴 했지만. 왠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인상을 찡그릴 네 표정이 상상되는데, 부탁이니까 조금이라도 얼굴 펴고 읽어줘. 누가 뭐래도 이누이 군은 환한 얼굴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이누이 군.
내가 오르페노크가 된 건 아주 우연한 사고 하나 때문이었어. 본래대로라면 나 역시 죽었어야 할 그 교통사고. 찌그러진 차체 안에서 나는 힘겹게 인간으로써의 마지막 숨을 내뱉어야 했고, 그로부터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병원 영안실에서 괴물로써의 저주받은 첫 숨을 들이마실 수 있었지. 신은 내 손에서 멋대로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빼앗아간 후, 그 자리에 우악스럽게 오르페노크라는 괴물의 인생을 쥐어줬어. 갈 데도 하소연할 데도 없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아픔만 남은 내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 끔찍했지. 끔찍하게 아프고 외로웠으며 날 떠나간 모든 사람들이 미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스마트레이디가 날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대로 미쳐버렸을지도 몰라. 꽤 많이 시끄럽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그런 여자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 덕분에 다른 오르페노크들과도 만날 수 있었어. 카이도와 유카 씨. 나와 똑같이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치느라 산것도 죽은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나의 동료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까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내 마지막 보루로 삼고 있었어. 참 웃기지? 이미 몇 번이나 사람을 죽인 전적이 있는 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이제부터라고 정해둔 이 얄팍한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아직은 인간이라고 나 자신을 부를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거야.
널 만나기 전까진.
너는 여러모로 특별한 존재였어. 나보다 훨씬 먼저 오르페노크로써의 삶을 시작한 주제에 스마트브레인에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럭키 클로버에 소속되어있지도 않았지. 나는 인간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길만을 택하고 있었지만, 너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편에서 싸우며 그들을 지키려고 했고.
하지만 이누이 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너 자신만큼은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 않았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너는 마치 불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네 몸을 마구잡이로 싸움터에 내던지면서도 그게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굴었지.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은 왜 또 그렇게 잘 하는지. 사실은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야. 안 그래?
그리고 네 그런 점은 내가 사라진 지 5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대로더라. 옛날부터 묘하게 완고한 면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혼자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도 슬슬 한계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마리 씨와 케타로 씨의 곁도 떠나 이렇게 혼자 살고 있는 거잖아. 두 사람이 혹시라도 네 상태를 눈치챌까봐.
이누이 군, 너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서툴러. 상처받는 게 익숙한 것처럼 구는 주제에 그렇게 받은 상처 하나하나를 무서워하는 겁쟁이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잔정이 많아 끝까지 네 주변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지. 근데 그거 알아?
마리 씨와 케타로 씨는 네가 지켜야만 하는 연약한 사람들이 아니야. 너와 함께 답을 찾아갈 소중한 동료들이지.
네가 말했었잖아. 우리들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자고.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었지만 너만큼은 훨씬 더 일찍 찾았으면 해.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야.
이쯤에서 작은 비밀을 하나 알려주도록 할까. 본래대로라면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기는커녕 이 곳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존재인 내가 어떻게 여기 와 있는지 혹시 알고 있어? 오늘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제일 모호해지는 날이거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몸을 가지게 된 우리들 오르페노크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날이 과연 어디에 있겠어?
해피 할로윈, 이누이 군. 이제 그만 널 기다리는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갈 때야. 다음번에 만날 땐 서로에게 익숙한 그 세탁소에서 볼 수 있길,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을게.
잘 지내줘.
- 키바 유지
키바에게.
편지 다 읽어봤다.
밤새 잠깐 다녀간 주제에 참 많이도 썼더라. 간만에 보는 건데 왔으면 왔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지 그랬냐. 내가 뭐 귀신 봤다고 놀랄만한 성격도 아닌데.
네가 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날짜를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달력이 없더라. 생각해보니까 내가 안 샀더라고. 세탁소에서 살던 때는 그런 거 안 샀어도 오늘이 며칠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케타로 녀석이 멋대로 가져온 달력을 보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마리한테 물어보는 걸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그곳을 나온 이후로 여러모로 많이 무뎌져 있었는데,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어이 키바.
나는 어쩌면 좋을까?
나도 참 바보같지. 손바닥만한 종이쪼가리에 백날 떠들어봤자 뭐하냐, 네가 나한테 대답을 해줄 리가 없는데.
그것보다 돌아가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지 말라고, 바보야.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의 사정이란 게 있단 말이다. 귀신이면서 그것도 모르고 온거냐? 그러면 뒤에 신 자는 왜 붙은 거야. 신 자가 붙었으니까 뭐든지 다 아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돼. 오히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네 쪽이라고. 잘 들어갔냐? 간밤에 꼬맹이들이 좀 돌아다녀서 많이 복잡하고 시끄러웠을 텐데 길 잃진 않았지? 뭐 어차피 날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상관없으려나. 티비에서 본 네 친구들은 다 날아다니더라. 가끔씩 기어가는 놈들도 보이긴 하지만.
쨌든 고맙다. 이런 편지 받아본 것도 처음이고, 답장 쓰는 것도 처음이라 많이 어색하지만 너에게 고맙다는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어.
아직은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네 말대로 잘 지내볼게, 나.
너도 거기서 잘 지내라.
다시 만날 땐 꼭 얼굴 비추고 가고.
이누이 타쿠미가.






